누크의 사선(국어판)

[환타지아 2000] 예술로 영화 만들기의 어려움

열혈연구 2000. 8. 14. 18:45
환타지아 2000
-예술로 영화 만들기의 어려움

@영화로 예술하기
미키의 아버지 월트 디즈니가 '콘서트 영화'로 <환타지아>를 선보였던 게 두 번째 갑자(甲子)를 맞았다. 예술의 일곱 번째 만신전에 오르고 싶었던 그의 꿈은 다시 스크린을 환하게 비춘다.

1천여 명의 스텝이 100만장 이상의 그림을 그리고, 64개 스피커에서 관현악과 맞춤해 보여주려 했던 당시 디즈니의 계획은 아쉽게도 2차 대전 한구석에 매장되고 말았다.

아무리 상업 감독의 이름을 달고 있더라도, 언젠가 한 번쯤은 붉은 주단을 밟고 싶은 게 인지상정. 스필버그의 유아취미는 전쟁의 위엄으로 변신을 거듭, 오스카의 전당에 올랐던 것을 보아도 확연하다.

매년 새로운 시퀀스를 넣어 종합예술로서 영화, <환타지아>를 선보이고자 했던 디즈니의 구상은 60년대 말 히피들과 영화 개론서의 음악 면을 채워주는 것으로 가치 형태를 바꿔갔다.

그러던 1991년.
열악한 VHS 비디오로 판매된 1400만장의 <환타지아>는 머지 않은 부활을 예고했고, 1999년 12월 17일,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실황으로 새로 태어났다.

다시 한번.
디즈니는 영화로 예술하고 만 것이다.

그사이.
클래식과 애니메이션을 접속한 '콘서트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쾌한 흑백 유머와 재기 넘치는 그림체의 가 개인적으론 훨씬 낫다고 본다.

하지만.
아이맥스에 유려한 3D 애니메이션, 유명 배우와 연주자까지 점철한 영화하기는 어린이의 손을 잡은 부모의 주머니로 쌓아 올린 디즈니의 자본력 없었더라면, 세기안에 다시 나올 수 없었으리란 생각이 짙게 든다.

고다르의 '귀로 듣는 영화' 역시 '소리로 보는 영화' 뒤를 밟았음을 시원스레 부인할 수 있을까? -물론 그라면 백가지 이유를 대겠지만.

칭찬이 과했다.

@예술로 영화 만들기.
멀게는 베토벤에서 가깝게 거쉬인까지 음악으로 예술하던 이들의 유명한 조각들은 <환타지아 2000>을 위해 선택받고 각각 8편의 맞춤 그림을 선물 받았다.

그래도 예의를 갖춰, 그들이 단 제목들을 나열해 보자.
(제목, 곡명, 작곡가, 연출 순으로)
Sequence 1 <운명의 테마 : 선악의 대결>, 교향곡 5번, 루드비히 반 베토벤, 픽소테 헌트
Sequence 2 <날아 다니는 고래의 전설>, 로마의 소나무, 오토리노 레스피기, 헨델 뷰토이
Sequence 3 <30년대 뉴욕의 일상 : 허쉬필드와 거쉬인의 만남>, 랩소디 인 블루, 조지 거쉬인, 에릭 골드버그
Sequence 4 <뮤지컬로 보는 동화>, 피아노 콘체르토 2번,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헨델 뷰토이
Sequence 5 <요요를 하는 플라밍고>, 동물의 사육제, 까미유 생상스, 에릭 골드버그
Sequence 6 <미키를 따라 환상의 세계로>, 마법사의 도제, 폴 듀커스, 제임스 알가
Sequence 7 <짝 잃은 도날드>, 위풍당당 행진곡, 에드워드 엘가, 프랜시스 글래바스
Sequence 8 <부활의 피날레 : 희망의 불꽃>, 불새,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개탄&폴 브리지

<환타지아>에서 익숙한 경험처럼 <환타지아 2000> 역시, 오선 악보 음표 하나마다 그림을 맺어 놓았다.
쉼표 없는 유려한 칸타빌레.

예술들이 모여 영화를 만들었으니, 누가 탓을 하랴.

절대 음감을 소유한 집착의 클래식 애호가들만이 조각난 예술과 가벼운 화면을 탓할 수 있는 유일한 비평가 일 듯.


@ 만인을 위한 애니메이션.
지방의 조그만 극장에, 그것도 1회에만 변칙 상영하는 <환타지아 2000>을 보러 들어선 순간 세 가지 아쉬움.

첫째
디즈니란 이름을 실감나게 했던 북적거리는 어린 관객들.
-안타깝게도 그들은 익숙한 슬랩스틱 시퀀스나 미키, 도날드 같은 캐릭터에 웃어 주었다. 대부분 혹은 몇몇은 계속되는 단편극장에서 옆자리의 부모에게 끝나는 시각을 묻거나, 스크린 아래 뻗친 손이 비치는 그림자 놀이네 열중하고 있었다.

둘째
아이맥스를 실감해야만 했던, 흑등 고래의 유영과 불새, 봄의 요정.
그들은 커튼으로 좌우를 가린 작은 스크린 위에서 열심히 음악에 맞춰 종종거리며 움직였다.

덧붙여 음악은 작은 용량의 스피커를 통해 화면을 겨우 맞추고 있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분명.
극장을 찾은 건 귀와 눈의 호사를, 오랜만에 이념과 오류에서 벗어나, 누려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절반 절반의 절반을 더 접은 채 <환타지아 2000>은 상업예술의 한계만을 남긴 채 멋진 메들리로 맺고 말았다.

동심에 호소하며 성인을 만족시키려는 몽상가이자 사업가 디즈니의 노력은 결국 그 정도의 결과로 눈앞에 나타난 것.

만인을 위한 계획은 절대 만인을 만족시킬 수 없는 법이다.


@ 그래도 다시 한번
각 시퀀스를 소개했던 스티브 마틴, 이작 펄만, 배트 미들러, 퀸시 존스, 안젤라 랜스베리, 제임스 얼 존스 등은 콘서트 홀의 무대에서 나름대로 실사-음악-와 영화-애니메이션-를 이어 놓는다.

코미디와 클래식, 재즈와 팝 그리고 TV를 가로지르는 이들의 이력이 연극적 무대 위에서 보이는 행동은 결국 <환타지아 2000>을 '종합 예술'로 화룡점정하고 싶어한 디즈니의 야심을 돕는 것에 그쳐 있지만, 아무리 화려한 춤에 짝짝 맞는 립싱크라도 라이브의 숨소리는 흉내낼 수 없는 생동감의 벽 뒤에 남겨질 수밖에 없다.

규모에 비해 빈약한 상상력-차라리 바닷 속 생물들의 화려한 뮤직 버라이어티, 'Under th Sea'가 그립다.-은 무성영화의 방식을 표방한 태생적 결함이었을지라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그렇듯 선악의 나비와 박쥐, 빙하와 비상고래 군(群), 불새와 자연의 부활은 무시할 만 했다. -빈약한 환경이여!

차라리.
예스럽던 '랩소디 인 블루'-화면조차 푸르게 푸르게-가 미국적이면서 뉴욕스러운, 만화적이면서 음악스러운-피아노를 딩딩거리던 거쉬인의 까메오까지-개중 백미(白眉)였다.


언제 일지 모르지만.
그때에는
조금만 껍질을 벗고,
훨씬 더 나은 환경에서 만나자꾸나.

월트 디즈니의 꿈이여.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