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집으로...> 사랑으로 그리는 세상의 모든 것

열혈연구 2002. 4. 24. 00:09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가 전국 200만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개봉전 우려를 말끔히 씻고, ‘이런 영화도 장사가 된다.’는 사례를 작성하는 중입니다. 이미 보신 분들도 많겠습니다만, 이 영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추억에 기대어 눈물을 짜게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서 눈물이 흐르는 영화죠. 딱히 이 감독의 전작 <미술관 옆 동물원>보다 완성도가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열배는 가슴 깊숙이 꽂힌답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게 어울릴만한 영화입니다.


집으로…
-사랑으로 그리는 세상의 모든 것


“죽기 전에 또 봐!” 가겟집 할머니는 아픈 무릎으로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상우 외할머니 등에 대고 말한다. 그리고 자꾸 돌아보는 그녀에게 “어여 가.” 손짓을 하며 보낸다.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는 사랑에 대한 감독의 두번째 이야기이면서 헤어짐에 대한 첫번째 이야기이다. 굳이 핏줄 아니라도,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는 사랑을 찾아내고 그로 인한 헤어짐이 얼마나 아쉬운 것인가 증명하는 잔잔한 실험극이다.

영화는 생활고로 인해 멀리 시골 외할머니께로 떠나는 상우의 여름 초엽에서 시작한다. 여행은 말끔한 기차에서 장닭 날아다니는 허름한 버스로 옮겨 타며 계속되고, 알지도 못하는 외할머니댁은 점점 가까워 온다.

할머니와 상우의 첫만남은 일방적인 공격으로 시작한다. 상우는 할머니의 고무신에 오줌을 누고, 대놓고 욕을 하며 벽에 낙서를 하는 등 발칙한 일을 서슴없이 한다. 상우의 감정은 햄, 콜라, 오락기 등의 도시적 소품들을 통해서 드러난다.(특히 오락기에 넣는 배터리는 서서히 줄어들어 끝내 흔적조차 살필 수 없게 되는 도시의 기억을 대표한다.) 산골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그리고 결국은 모두 닳아 쓸 수 없게 되는 인공적인 것들은 하나 둘 상우의 곁을 떠나간다.

반대로 낯설음과 불편함이었던 상우의 공격성은 할머니의 자연스러움과 화해하기 시작한다. 화해한 듯 했다가도 금새 토라져 뻔뻔해지는 상우와 감독의 시선이 따뜻하게 묻어 있는 착한 할머니의 시소게임은 자연의 모습과 닮아 있다. 거북한 상우의 변덕스러움이 인간적이라면, 할머니의 넉넉함은 신적에 가깝다.

<집으로…>의 놀라운 점은 괘씸하리만치 못난 손주 녀석이 정말로 착한 할머니와 살면서 대립에서 화해로 변해가는 순간을 자연스레 포착한다는 것이다. 즉 관객을 울리고 말리라는 감상주의에서 한걸음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 감독은 때로는 안타까움과 아쉬움 때로는 기쁨과 감사함 등 다양한 종류의 눈물을 준비한다. 관객이 선택할 수 있는 감정의 넓이는 단순한 시골 생활 경험이 아닌 사랑을 받는다는 기억을 되찾도록 도와준다. 폭풍처럼 몰아가 절정에 이르는 내러티브의 공식을 버린 감독의 선택은 단지 두편의 영화만으로 관객의 감정을 전략 아닌 동의로 조절하는 게 대가의 것에 가깝다.

자연스러움에 이르는 길은 겉모양에서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때로는 표현주의적이고 그림자극에 가까운 쇼트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작위성을 배제한 카메라와 실사조명은 자극보다는 편안함에 반응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주로 표준렌즈를 사용한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다. 포커스 인 아웃이나 나눠찍기로 이동을 최소화한다. (이에 반해 들고 찍은 미친소 씬들은 다소 튀는 감이 있다.) 카메라가 움직이는 대신, 초점을 이동하거나, 서로 다른 크기의 쇼트를 연결하거나, 같은 크기의 쇼트를 반복함으로써 차분하지만 지루하지 않는 씬을 구성한다.

이때 재기 넘치는 장면이 속속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상우가 로봇을 들고 “출동” 하며 문밖으로 나오는 씬을 보자. 방 안에서 상우의 장난은 로봇이 쥐어 있는 손의 클로즈 업이나 앉아 있는 상우를 가득 담은 풀 쇼트로 다뤄진다. 하지만 그가 방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뛰어나오면 카메라는 멀찍하게 떨어져 롱 쇼트로 변한다. 상우가 이전에 놀던 곳은 방문으로 나뉘어진 구획설정의 차이가 크지 않던 도시였다. 하지만 문 하나를 경계로 인공과 자연의 대비가 명확한 산골집에서의 놀이는 같은 것이었음에도 그에게 생뚱같았을 것이다. 제시된 롱 쇼트는 백마디의 내레이션보다 명확한 심리묘사라 하겠다.

또 할머니가 앓아 눕자 점심을 차리는 상우의 행동은 어떤가. 카메라는 밥상에 고정되어 있다. 부지런히 오가는 상우의 손, 그 끝에 달려 불안하게 움직이는 물, 소금 등을 가만히 잡고 있을 뿐이다. 할머니를 걱정하는 대사하나 없지만 상우의 서투른 손끝이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장면이 바뀌면서, 할머니에게 내미는 상 뒤에서 씨익 웃으며 올라오는 상우의 얼굴이 어찌 귀엽지 않겠는가.

<집으로…>에는 ‘온전한 가정이 제대로 된 아이를 만든다’는 할리우드식 가족 이데올로기가 없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혼자이다. 이는 전례가 드문데, <맨발의 청춘>이나 <바보들의 행진>, <고래사냥>으로 이루어진 청년물에서나 등장하는 방식이다.

이 감독은 사랑을 이미 해체되어 있는 가족에서 그것도 노인과 아이만 남겨 있는 시골에서 찾는다. 영화 이전이 이야기겠지만, 이혼한 어머니는 이제껏 상우를 데리고 외할머니께 인사 한번 드리지 않은 듯하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란다. 상우는 생면부지인 할머니(‘병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정서적 유대감이 없었던)에게서 사랑을 배운다.

할머니는 타산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선 옛스러운 존재다. 그녀는 딸이 주고간 보약을 몸져누운 옆 동네 할아버지에게 주고 오며, 당신은 걸으면서도 손자녀석 오락기 배터리 살 돈을 모아두고, 쵸코파이 받으며 나물 뭉치라도 놓고 와야 마음이 놓이는 분이다. 할머니는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짐 자무쉬의 <고스트 독>에는 영어를 쓰는 킬러 고스트 독과 불어밖에 모르는 아이스크림 장수의 우정이 등장한다. 둘은 각자의 말로 이야기 하지만 서로의 메시지는 놀랄 만큼 정확히 상대에게 전달되고 완벽한 의사소통의 단계인 깊은 우정이 성립한다. 말을 하지 못하는 할머니는 듣기만하다 손끝에 내미는 마음으로도 가겟집 할머니와 자전거 할아버지 철이 등과 이야기할 수 있다. 한쪽의 몸과 다른 한쪽의 목소리로 주고 받는 이야기들은 완벽하지 않은 가정에서 저마다 잘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좋은 관계를 낳고 사랑을 만든다.

노인과 아이는 먹고 살 걱정에서 한걸음 떨어져 있다는 데서, 또 ‘나이 먹으면 애가 된다’는 옛 이야기처럼 공감대를 형성하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반면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노인들은 아픈 몸으로 스스로 고립되어갈 수 밖에 없고, 아이들은 얼른 자라서 새것을 찾아 떠나려 한다. 하지만 <집으로…>는 둘 다 아니라 고집스레 말한다. 그래서 이곳의 시골은 노인과 아이 밖에 없지만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모두가 서로를 생각하는 천국으로 남아 있다.

상우는 자랐다. 신고 왔던 신발은 접어야만 발가락이 아프지 않다. 목 주위는 까맣게 탔고 이제 제 가슴을 쓸어 할머니를 아프게 했던 미안함을 건넬 줄도 안다. 이 감독의 실험은 우리가 알면서도 하지 않고 있던 감상주의와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잔잔한 도전이다. 도구는 간단해 보인다. 기본적인 스토리와 고전적인 스타일이 그것이다. 여기에 새로운 한국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있는지 모른다. 풍성한 게 가을 같은 봄날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