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잔뿌리로 이루어진 가상역사 교훈극

열혈연구 2002. 3. 5. 18:18
구설수의 뭉텅이, 솔트 레이크 동계 올림픽의 얼음도 이제 다 녹았습니다. 여기에 FX 사업이 곁들어져 개국이래 가장 높은 반미감정 지수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20세기 정 중앙에 있던 아픈 기억을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전쟁은 알력의 다툼으로 여전히 우리와 가깝습니다. 너무 늦게 돌아와 죄송합니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잔뿌리로 이루어진 가상역사 교훈극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터에 그려가는 가상 역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억을 덮을 만큼 강렬하고 치밀한 이음새이다. 2009년 일본 제국의 세번째 도시인 서울.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처단하는데 실패하고 역사의 연대표가 바뀌어 있음을 알려주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초반 10분 가량의 씬들은 아쉽게도 이성과 감정, 어느 한 곳도 오버랩하지 못한다.

히로부미가 하얼삔 역에 도착했던 1909년 10월 26일. 2009년은 안중근의 하얼삔 거사 실패를 기점으로 비틀린 새로운 현재이다. 사카모토(장동건)와 사이고(나카무라 토오루)가 찾아가는 때 역시 기점이다. 영화에서 시간은 선형적으로 움직인다. 즉, 하얼삔 거사 실패 A, 일본 제3도시 서울이 있는 2009년이 B, 독립기념관이 있는 현재를 C라고 한다면, 영화 초반의 역사는 ‘A라는 사건으로 인해 B가 발생했다.’는 것이고, 사카모토가 A를 수정한다면 C가 발생하는 식이다.

JBI의 특수요원인 사카모토는 배신자로서 동료에게 살해당한 아버지의 기억을 지웠다. 이토회관 진압씬이 끝나고 수사과정을 접어 총성이 잦아든 첫번째 장소는 다름아닌 사카모토의 집이다. ‘아버지-아들’의 관계를 부정하면서도 연상되는 ‘집-생일’의 관계는 그의 의지로 계획된 미래에 미묘한 흔들림을 보여준다. 그의 곁에 가족처럼 자리한 친구 사이고는 한국계 일본인으로서 엘리트 수사원인 사카모토가 가진 일본인이고자 하는 소망과 맥락을 같이한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가 지향하는 지점은 대한민국을 삭제한 설정과 아버지를 부정하는 사카모토의 거부, 정확히 반대쪽에 있다. 또 하나의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포석을 뒤집음으로써 반전의 묘미를 선물하고자 했지만 아쉽게도 할리우드의 약점만이 두드러진다. 영화를 보는 두시간 동안은 세가지 전제를 받아들일 애국심이 필요하다. 그것은 때때로 이유 없는 규모의 대결, 뻔한 스토리와 이를 압도하는 스타파워다.-이시명 감독의 가장 큰 실수는 감상에 빠지게 할 타겟이 관객 아닌 배우였다는데 있다. 위기의 순간에서 시간을 멈추게 할만큼 강력한 감상주의(혹은 스타파워)는 가슴에 불을 지를 플롯에 빠져들지 못하게 가로 막는다.-애국심이라면 지나친 진지함이 감상주의로 변환하는 순간을 충분히 즐길만한 소극(笑劇)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돋보였던 것은 다름아닌 개봉 이전 홍보였다. 개중 하나는 영화의 개봉이전 불일은 친일 논쟁이다. 이를 제외하면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SF, 최대 물량의 총화기, 사상 최대 규모의 세트, 엄청난 제작비 등은 이전 영화들의 홍보 전략과 다를 바가 없다. 아니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를 이을 수 있는 고리-귀를 찢는 총격씬, 눈물겨운 동료애-와 <친구>의 배우와 지역색-한국의 중심인 서울이 아닌 일본의 변방인 서울-이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근간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이런 식의 유사점은 나아가 영화 안에서도 반복 등장한다. 우선, 상영시간 내내 귀를 감싸는 이동준의 음악은 <쉬리>와 비슷한 패턴을 양산한다. 초반 진압씬의 공유와 여전사, 도로 차량폭파, 어색한 발음의 여배우, 과격행동단체, 포카리스웨트에 이르는 모든 유사점들은 그곳에 흐르는 음악을 통해 기시감에 가까운 경험을 가능케한다.

할리우드의 방식과, 이전 영화들의 흔적에 복거일의 냉소를 담은 <2009년 로스트 메모리즈>의 역사의식은 한편으로 위험하다. 과거 찬란했던 고구려의 역사에 왜곡된 역사를 교정하는 것을 넘어 역전시키자는 엉뚱한 논리이다. 20세기 비극의 주연중 하나인 일본의 제국주의와 다를 바 없는 주장이다. 이에 비하면 이우혁의 ‘퇴마록’이나 김진명의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가상은 훨씬 성숙하다. 중요한 것은 과거와 현재가 아니라 미래까지 아우르는 시간의 총체 그리고 주체로서 우리의 존재이다. 한국 영화의 아쉬운 도전은 또다시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이사야 49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