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의 사선(국어판)
<킬러들의 수다> 그의 혈액형은 연극
열혈연구
2002. 1. 3. 11:19
이번 주에 <킬러들의 수다>가 출시되더군요. 장진 감독은 아시다시피 대학로 연극계의 젊은 스타 연출가입니다. <기막힌 사내들>, <간첩 리철진>에서 선보인 그의 냄새는 스타와 자본이 부어진 본 영화에서도 여전히 진하게 납니다. 찬반의 소리가 엇갈리지만 저는 그에게 한표를 던져주고 싶습니다. 조금은 다른 감독들이 먹고 살 수 있다는 건 우리 영화계가 건강하다는 말일텝니다. 2002년이 밝았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행복한 한해 만드시길 바랍니다. 월드컵 선수들의 선전도 함께 기원해야겠죠. ^^
킬러들의 수다
-그의 혈액형은 연극
장진 감독의 영화는 블랙 코미디이다. 그의 냉소적인 시선은 세상에 맞춰있다. 사람에게 다가서면 비루했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휴먼 코미디가 된다. 그들은 ‘기막힌’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 모두 잘못된 세상 탓이라고 말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안녕하세요 하나님>, <러브 스토리>, <정>에서 근근히 살아온 배창호의 인물들이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파란대문>, <섬>, <수취인 불명>에서 반복 혹은 변주된 김기덕의 세계에 살고 있는 식이다. 세 번째 연출작, <킬러들의 수다>에서 킬러는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직업이 아니다. 영화는 오프닝과 첫 시퀀스에서 이미 꼭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는 세상, 그래서 킬러들이 필요한 세상이라고 단정한다. 킬러들은 의뢰인과 추적자들의 관계 속에서 냉혹함 아닌 인간다움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조용히 한강 위를 움직이는 카메라를 따라 킬러들의 첫 번째 임무가 시작된다.
카메라는 강의 흐름을 따라 이동하고 있다. 다리 밑을 지날 즈음에는 앙각(low-angle)으로 올려다본다. 프레임 한편으로 다리가 사라지면, 카메라는 드러난 하늘로 비상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 씬은 별다른 특이점이 없다. 관객은 감독의 트릭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때 ‘속지 않는 자가 오류를 범한다’는 라캉의 모토가 힘을 발휘한다. 의식이 집중되어 있는 공간, 한강의 하늘은 그대로 두면서, 망막 뒤에 놓여 있는 카메라의 존재를 조용히 바꾸는 것이다. 관객은 카메라가 바뀌는 잠깐 동안에 영화의 전반에 걸쳐 사용할 유머 방식을 모르는 사이 건네 받는다. 감독은 흔히 바다나 하늘로 카메라가 움직일 때 이용하는 장면 전환 방식-서울의 하늘인 줄 알았는데 동경의 하늘이더라는 식-을 태연히 거절한다. 대상을 그대로 두고 이를 담아내는 카메라를 교체함으로써 관객에게 영화를 보면서 일상적으로 적용하는 관람 방식을 버리라고 부추긴다. 이것이 장진이 내세운 또 다른 영화보기이다. 그는 <기막힌 사내들>의 뮤지컬에 이어 연극을 제시함으로써 색다른 볼거리에 가슴을 열고 다가오라 한다.
그의 영화는 ‘장진극단작품’이란 말이 어울릴 듯 싶다. 그가 연출한 세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절반 이상이 고스란히 겹친다. 그들은 장진의 영화마다 서로 다른 역할을 맡으며 감초처럼 등장한다. <킬러들의 수다>에서도 주역을 맡은 신하균, 정재영은 물론이고 손현주, 김원희 등이 곳곳에 자리함으로 인해 그의 전편들을 기억하는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면에서 장진의 영화는 캐릭터 영화에 근접한다. 이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심각하다. 그들은 목숨이 걸린 상황에 처해 있고, 그보다 더한 실존적 고민을 안고 있다.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들이 모인 <기막힌 사내들>, 택시강도를 당한 남파간첩의 임무수행을 다룬 <간첩 리철진>에 이어 <킬러들의 수다>에서는 예술의 전당에서 살인을 감행하는 ‘4인조남성킬러’가 등장한다.
장진은 캐릭터의 확립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플래쉬 백이나 곳곳에 자리한 내레이션으로 등장하는 인물 중 어느 하나도 소홀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살아 있는 예술’로서 가장 중요한 표시인 배우와 배역의 관계를 다지는 것이다. 연극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하연의 사랑에 대한 장광설은 연극과 캐릭터가 만나는 행복한 접점이다. 감독은 연극의 대사 형식을 도입한다. 하연은 “사랑을 하고 있는 거야”라며 독백을 시작한다. 하연은 정우가 사랑에 빠졌다는 논리를 펼치는데, 그의 과장된 동작과 풍부한 표정은 무대 위 배우의 것과 같다. 특이한 것은 하연의 독백과 함께 연극의 방백과 같은 그의 내레이션이 동시에 깔리는 점이다. 방백은 독백의 일종이다. 이는 관객에게만 들리고 상대역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극보다 웃음의 약속이 많은 희극에서 주로 사용된다. 하연의 내레이션은 방백의 장점을 그대로 발휘한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킬러들은 하연의 방백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극도로 심각하고 감성적인 하연의 독백만으로도 웃음을 참지 못한다. 하연은 킬러들이 몰래 웃고 있는 탓에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관객은 하연의 독백과 내레이션을 모두 들으면서 이들의 엇갈린 소통이 빚어내는 소극(笑劇)에 웃음짓게 된다. 킬러들의 고개 숙인 웃음에 동감하는 관객들이 연극의 관객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반면 공연의 일부분을 그대로 도입한 예술의 전당의 햄릿 씬은 <킬러들의 수다>의 희비가 엇갈리는 교차점이다. 감독은 햄릿의 내용을 영화의 인물, 사건과 깊숙이 연결시켰지만 그 무게가 코미디의 경계를 넘어서고 만다. 그러나 뮤지컬을 도입했던 <기막힌 사내들>의 군무 씬이 판타지에 그친 것에 비하면 훨씬 다듬어지고 있다. 우선 햄릿이 킬러들의 다른 이름임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막이 오르면 햄릿의 절규가 시작된다. 선왕의 유령을 본 성벽 장면이다.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면서 시작한 햄릿의 성찰 혹은 자기회의는 킬러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적용된다. 그들은 선생님을 죽여달라 의뢰하는 여고생에게 이렇게 말하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물론 킬러들은 햄릿의 비극을 딛고 희극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에게 햄릿공연이 적용되었을까. 그 단계를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1단계는 아버지의 존재감이다. 아버지의 흔적은 선친의 유언, 무기를 제공하는 아저씨, 그들을 쫓는 조 검사에게 조금씩 나뉘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성벽에서 홀연히 나타난 유령처럼 킬러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인도한다. 2단계는 연인 오필리어이다. 킬러들은 TV 아나운서인 오영란을 동경하고 있다. 어느 날 그녀는 킬러들에게 살인을 의뢰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공연 도중 죽여야 한다는 위험한 단서가 붙는다. 킬러들은 사랑의 매혹에 빠져 치명적인 의뢰를 수락하고 뛰어든다. 그리고 이들은 마지막 단계인 햄릿의 죽음을 통해 거듭난다. 킬러들은 재영의 총성, 관객의 박수, 내리는 눈, 날개처럼 퍼져가는 피로 인해 햄릿의 껍질을 벗는다. 연극의 마지막에 놓인 레어티스의 절규는 이들의 거듭남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장진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사회규범의 잣대로 볼 때 범죄자이다. 전과자, 자살소동 상습범, 간첩, 살인자로 구성된 그들은 사회에 편입되기 힘든 운명을 갖고 있다. 감독의 애정으로 인해 비록 좋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사회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정화(淨化, katharsis)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 장진 영화를 관통하는 미묘한 태도의 일관성이 있다. 바로 여성관이다. 그의 영화에서 여성은 이미 정화의 단계를 거친 상태다. 그녀는 성스러움과 모성을 동시에 가진 마리아의 반영체에 가깝다. 이에 대표격인 여성은 전작 두 편에서 같은 이름으로 등장하는 화이이다. 그녀는 버려진 아이들을 보살피고 간첩마저 여린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이상적인 어머니이자 연인의 이미지를 품고 있다. 타락한 세상-혹은 남자-은 그녀를 힘들게 한다. 천사 같은 여자가 악마 같은 남자들의 줄기찬 공격을 받는다는 식의 설정은 이미 18세기 영국에서 확립된 시민소설에서 선보인 적이 있다. 킬러들의 살인은 천사를 돕고 자신을 구원하는 선한 사업이 된다. 이것만이 킬러들의 과거를 정화할 수 있는 것이다.
<킬러들의 수다>에서 돋보이는 것은 영화에 대한 감독의 자신감이다. 이 자신감의 혈관에는 연극이라는 피가 흐르고 있다. 장진에게 연극은 이명세의 만화적 판타지나 박광수의 역사의식처럼 조금씩 모양을 달리하더라도 결코 빠지지 않는 필수요소로 자리잡을 듯 보인다. 연극을 제쳐두고서라도 다양한 카메라 워크, 분할화면, 패러디 등을 더하며 표현의 방법 역시 전작에 비해 풍부해졌다. 관객장악에 나선 장진의 행보는 제작비, 스타, 배급력을 더하면서 가뿐해 보인다. 이제 새롭게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하나뿐인 듯 싶다. 매끄러운 형태를 완성함과 동시에 복제로 변질되기 십상인 타락의 굴레를 피하는 것 말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로마서 1 : 22)
킬러들의 수다
-그의 혈액형은 연극
장진 감독의 영화는 블랙 코미디이다. 그의 냉소적인 시선은 세상에 맞춰있다. 사람에게 다가서면 비루했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휴먼 코미디가 된다. 그들은 ‘기막힌’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 모두 잘못된 세상 탓이라고 말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안녕하세요 하나님>, <러브 스토리>, <정>에서 근근히 살아온 배창호의 인물들이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파란대문>, <섬>, <수취인 불명>에서 반복 혹은 변주된 김기덕의 세계에 살고 있는 식이다. 세 번째 연출작, <킬러들의 수다>에서 킬러는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직업이 아니다. 영화는 오프닝과 첫 시퀀스에서 이미 꼭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는 세상, 그래서 킬러들이 필요한 세상이라고 단정한다. 킬러들은 의뢰인과 추적자들의 관계 속에서 냉혹함 아닌 인간다움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조용히 한강 위를 움직이는 카메라를 따라 킬러들의 첫 번째 임무가 시작된다.
카메라는 강의 흐름을 따라 이동하고 있다. 다리 밑을 지날 즈음에는 앙각(low-angle)으로 올려다본다. 프레임 한편으로 다리가 사라지면, 카메라는 드러난 하늘로 비상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 씬은 별다른 특이점이 없다. 관객은 감독의 트릭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때 ‘속지 않는 자가 오류를 범한다’는 라캉의 모토가 힘을 발휘한다. 의식이 집중되어 있는 공간, 한강의 하늘은 그대로 두면서, 망막 뒤에 놓여 있는 카메라의 존재를 조용히 바꾸는 것이다. 관객은 카메라가 바뀌는 잠깐 동안에 영화의 전반에 걸쳐 사용할 유머 방식을 모르는 사이 건네 받는다. 감독은 흔히 바다나 하늘로 카메라가 움직일 때 이용하는 장면 전환 방식-서울의 하늘인 줄 알았는데 동경의 하늘이더라는 식-을 태연히 거절한다. 대상을 그대로 두고 이를 담아내는 카메라를 교체함으로써 관객에게 영화를 보면서 일상적으로 적용하는 관람 방식을 버리라고 부추긴다. 이것이 장진이 내세운 또 다른 영화보기이다. 그는 <기막힌 사내들>의 뮤지컬에 이어 연극을 제시함으로써 색다른 볼거리에 가슴을 열고 다가오라 한다.
그의 영화는 ‘장진극단작품’이란 말이 어울릴 듯 싶다. 그가 연출한 세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절반 이상이 고스란히 겹친다. 그들은 장진의 영화마다 서로 다른 역할을 맡으며 감초처럼 등장한다. <킬러들의 수다>에서도 주역을 맡은 신하균, 정재영은 물론이고 손현주, 김원희 등이 곳곳에 자리함으로 인해 그의 전편들을 기억하는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면에서 장진의 영화는 캐릭터 영화에 근접한다. 이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심각하다. 그들은 목숨이 걸린 상황에 처해 있고, 그보다 더한 실존적 고민을 안고 있다.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들이 모인 <기막힌 사내들>, 택시강도를 당한 남파간첩의 임무수행을 다룬 <간첩 리철진>에 이어 <킬러들의 수다>에서는 예술의 전당에서 살인을 감행하는 ‘4인조남성킬러’가 등장한다.
장진은 캐릭터의 확립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플래쉬 백이나 곳곳에 자리한 내레이션으로 등장하는 인물 중 어느 하나도 소홀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살아 있는 예술’로서 가장 중요한 표시인 배우와 배역의 관계를 다지는 것이다. 연극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하연의 사랑에 대한 장광설은 연극과 캐릭터가 만나는 행복한 접점이다. 감독은 연극의 대사 형식을 도입한다. 하연은 “사랑을 하고 있는 거야”라며 독백을 시작한다. 하연은 정우가 사랑에 빠졌다는 논리를 펼치는데, 그의 과장된 동작과 풍부한 표정은 무대 위 배우의 것과 같다. 특이한 것은 하연의 독백과 함께 연극의 방백과 같은 그의 내레이션이 동시에 깔리는 점이다. 방백은 독백의 일종이다. 이는 관객에게만 들리고 상대역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극보다 웃음의 약속이 많은 희극에서 주로 사용된다. 하연의 내레이션은 방백의 장점을 그대로 발휘한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킬러들은 하연의 방백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극도로 심각하고 감성적인 하연의 독백만으로도 웃음을 참지 못한다. 하연은 킬러들이 몰래 웃고 있는 탓에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관객은 하연의 독백과 내레이션을 모두 들으면서 이들의 엇갈린 소통이 빚어내는 소극(笑劇)에 웃음짓게 된다. 킬러들의 고개 숙인 웃음에 동감하는 관객들이 연극의 관객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반면 공연의 일부분을 그대로 도입한 예술의 전당의 햄릿 씬은 <킬러들의 수다>의 희비가 엇갈리는 교차점이다. 감독은 햄릿의 내용을 영화의 인물, 사건과 깊숙이 연결시켰지만 그 무게가 코미디의 경계를 넘어서고 만다. 그러나 뮤지컬을 도입했던 <기막힌 사내들>의 군무 씬이 판타지에 그친 것에 비하면 훨씬 다듬어지고 있다. 우선 햄릿이 킬러들의 다른 이름임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막이 오르면 햄릿의 절규가 시작된다. 선왕의 유령을 본 성벽 장면이다.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면서 시작한 햄릿의 성찰 혹은 자기회의는 킬러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적용된다. 그들은 선생님을 죽여달라 의뢰하는 여고생에게 이렇게 말하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물론 킬러들은 햄릿의 비극을 딛고 희극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에게 햄릿공연이 적용되었을까. 그 단계를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1단계는 아버지의 존재감이다. 아버지의 흔적은 선친의 유언, 무기를 제공하는 아저씨, 그들을 쫓는 조 검사에게 조금씩 나뉘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성벽에서 홀연히 나타난 유령처럼 킬러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인도한다. 2단계는 연인 오필리어이다. 킬러들은 TV 아나운서인 오영란을 동경하고 있다. 어느 날 그녀는 킬러들에게 살인을 의뢰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공연 도중 죽여야 한다는 위험한 단서가 붙는다. 킬러들은 사랑의 매혹에 빠져 치명적인 의뢰를 수락하고 뛰어든다. 그리고 이들은 마지막 단계인 햄릿의 죽음을 통해 거듭난다. 킬러들은 재영의 총성, 관객의 박수, 내리는 눈, 날개처럼 퍼져가는 피로 인해 햄릿의 껍질을 벗는다. 연극의 마지막에 놓인 레어티스의 절규는 이들의 거듭남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장진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사회규범의 잣대로 볼 때 범죄자이다. 전과자, 자살소동 상습범, 간첩, 살인자로 구성된 그들은 사회에 편입되기 힘든 운명을 갖고 있다. 감독의 애정으로 인해 비록 좋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사회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정화(淨化, katharsis)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 장진 영화를 관통하는 미묘한 태도의 일관성이 있다. 바로 여성관이다. 그의 영화에서 여성은 이미 정화의 단계를 거친 상태다. 그녀는 성스러움과 모성을 동시에 가진 마리아의 반영체에 가깝다. 이에 대표격인 여성은 전작 두 편에서 같은 이름으로 등장하는 화이이다. 그녀는 버려진 아이들을 보살피고 간첩마저 여린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이상적인 어머니이자 연인의 이미지를 품고 있다. 타락한 세상-혹은 남자-은 그녀를 힘들게 한다. 천사 같은 여자가 악마 같은 남자들의 줄기찬 공격을 받는다는 식의 설정은 이미 18세기 영국에서 확립된 시민소설에서 선보인 적이 있다. 킬러들의 살인은 천사를 돕고 자신을 구원하는 선한 사업이 된다. 이것만이 킬러들의 과거를 정화할 수 있는 것이다.
<킬러들의 수다>에서 돋보이는 것은 영화에 대한 감독의 자신감이다. 이 자신감의 혈관에는 연극이라는 피가 흐르고 있다. 장진에게 연극은 이명세의 만화적 판타지나 박광수의 역사의식처럼 조금씩 모양을 달리하더라도 결코 빠지지 않는 필수요소로 자리잡을 듯 보인다. 연극을 제쳐두고서라도 다양한 카메라 워크, 분할화면, 패러디 등을 더하며 표현의 방법 역시 전작에 비해 풍부해졌다. 관객장악에 나선 장진의 행보는 제작비, 스타, 배급력을 더하면서 가뿐해 보인다. 이제 새롭게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하나뿐인 듯 싶다. 매끄러운 형태를 완성함과 동시에 복제로 변질되기 십상인 타락의 굴레를 피하는 것 말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로마서 1 :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