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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Faille> : 뻔한 것들에 변명

열혈연구 2007. 5. 17. 23:34

 

한 젊은 검사가 아내를 죽인 한 남자와 유죄 여부를 놓고 두뇌싸움을 한다. <양들의 침묵>의 안소니 홉킨스가 주연한 <프라이얼 피어>, <프리퀀시>의 감독 그레고리 호블릿의 연출작.

 

감독 : 그레고리 호블릿

상영시간 : 1시간 50

개봉일 : 2007 5월 9

출연 : 안소니 홉킨스, 라이언 고슬링, 데이빗 스트라탄 등

 

 

어디선가 본듯한 장면들

일반적인 미국 상업영화들은 각 장르별로 찾기 쉬운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를 할리우드 공식이라 부르기도 한다. 옛 서부영화에서 인디언은 늘 악당으로 나온다거나, 최근 영화들에서 한국인은 돈을 밝히는 슈퍼주인이나, 조직폭력배로 그려지는 것도 일종의 할리우드 공식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어디선가 여러 번 본듯한 장면이나 이야기, 극중인물 등을 일컬어 클리쉐(cliché)라 한다.

 

영화는 아내의 외도를 눈치챈 노년의 엔지니어 테드가 불륜 현장을 몰래 찾아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튿날 아침, 테드는 집으로 돌아온 아내를 향해 총을 쏜다. 사건을 해결하러 달려온 경찰측 협상가 롭은 총에 맞은 여자가 자신이 어제 함께 했던 제니퍼임을 알고 흥분한다. 범행을 고백한 테드는 변호사 없이 검사 윌리엄과 법정에서 맞선다. 헌데 명백해 보였던 테드의 유죄 판결은 미궁에 빠져들어간다. 느긋한 미소를 짓는 테드, 속이 타들어가는 롭, 정의감에 불타는 윌리엄의 삼각 대결이 은막 위에 펼쳐진다.

 

 

뻔한 것은 편리하다

클리쉐는 연판(鉛版)을 뜨다라는 의미의 ‘clicher’에서 나온 용어다. 쇳물을 주형에 부을 때 나는 소리를 본 뜬 의성어 clicher는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의 어원으로 딱 맞아 떨어지는 단어라 하겠다. 주형을 통해 찍혀 나오는 주물처럼 작품 속에서 습관처럼 쓰이는 클리쉐들은 뻔하다는 이유로 자주 비판을 받는다. 반면 복잡하거나 길게 설명해야 하는 상황을 간단하고 알기 쉽게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할리우드 영화는 클리쉐의 결합체다.”라는 말이 꼭 틀리진 않다. 넓게 보면 장르 영화들은 클리쉐의 조합이다. 지구를 구하는 영웅담, 스타의 성공담, 가슴 설레는 연애담, 섬찟한 범죄담, 소름돋는 공포담은 물론 배꼽잡는 희극과 눈물어린 비극까지 할리우드 영화는 클리쉐 한마당이나 다름없다.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우리는 뻔하다고 투덜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영화들을 즐겨본다. 유수 영화제 훈장을 치렁 치렁 매단 영화들을 연달아 몇 편 보고나면, 할리우드 영화를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머릿속에 명확히 떠오른다. 보기 편하기 때문이다.

 

놓쳐서는 안될 사람들

<La Faille>는 영민한 스릴러 영화다. 바람 핀 아내를 죽인 남편, 불륜의 당사자인 형사, 진실을 밝히고픈 검사가 벌이는 심리전은 충분히 흥미를 자극한다. 우리 영화 <동감>(2000)과 유사해 인류는 하나다라는 생각을 들게 했던 <프리퀀시>(2000)의 감독 그레고리 호블릿은 <프라이멀 피어>에서 선보였던 감각을 다시 들고 왔다. 느긋한 모습의 안소니 홉킨스는 오랜만에 돌아와 차분한 살인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정지우 감독의 <해피앤드>에도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죽이는 남편이 나온다. 영화의 마지막 신에서 태연히 신문을 펴고 발톱을 깎는 남편의 모습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La Faille>에도 아내의 불륜을 살인으로 대처하는 극단적인 남편의 선택이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고 결론짓는 방법은 <해피앤드>와 하늘과 땅 차이다. 권선징악이라는 만고의 클리쉐가 기둥이 되어주는 영화, <La Faille> 는 영화제표 영화들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딱 알맞은 영화다.